헤르베르트 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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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베르트 베너는 190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공산주의 활동을 거쳐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927년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1946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서독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에 기여하고, 빌리 브란트 정부에서 원내 총무를 역임하며 동방 정책 추진을 지원했다. 1983년 정계 은퇴 후 1990년 사망했으며, 그의 정치적 유산과 논쟁적인 정치 스타일은 독일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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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베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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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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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헤르베르트 리하르트 베너 |
출생일 | 1906년 7월 11일 |
출생지 | 드레스덴, 작센 왕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90년 1월 19일 |
사망지 | 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서독 |
정당 | 독일 공산당 (1927–1942) 독일 사회민주당 (1946–1990) |
배우자 | 로테 뢰빙거 (1927년 결혼, 1928년 이혼) 샤를로테 부르메스터 (1944년 결혼, 1979년 사별) 그레타 부르메스터 (1983년 결혼) |
자녀 | 2명 (입양) |
직업 | 정치인 |
서명 | Herbert Wehner Signature Alt.png |
공직 | |
야당 대표 | 임기 시작: 1982년 10월 1일 임기 종료: 1983년 3월 6일 총리: 헬무트 콜 전임: 헬무트 콜 후임: 한스요헨 포겔 |
연방의회 내 사회민주당 대표 | 임기 시작: 1969년 10월 22일 임기 종료: 1983년 3월 8일 전임: 헬무트 슈미트 후임: 한스요헨 포겔 대표: 빌리 브란트 |
전독일 장관 | 임기 시작: 1966년 12월 1일 임기 종료: 1969년 10월 21일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전임: 요한 밥티스트 그라들 후임: 에곤 프랑케 |
연방의회 의원, 함부르크-하르부르크 지역구 | 임기 시작: 1949년 8월 14일 임기 종료: 1983년 3월 6일 전임: 의회 설립 후임: 한스울리히 클로제 |
작센 주의회 의원 | 임기 시작: 1930년 7월 10일 임기 종료: 1931년 6월 18일 전임: 다수 의원 선거구 후임: 막스 질버만 |
소속 기관 | |
중앙 기관 가입 | 1935–1942: 정회원, KPD 정치국 1935–1942: 정회원, KPD 중앙위원회 |
2. 생애
1906년 7월 11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2] 젊은 시절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1927년)하여 활동했으나,[2] 나치 정권 수립 후 망명하여 모스크바 등지에서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를 겪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웨덴에서 간첩 혐의로 수감된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5]
1946년 독일로 돌아와 함부르크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5] 당 의장 쿠르트 슈마허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83년 정계 은퇴 시까지 연방의회 의원직을 유지했으며, 당의 노선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에 기여했다.[6]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CDU) 총리의 대연정 내각에서 전독일 문제 담당 연방 장관을 역임했고,[7] 이후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 총리 시기(1969-1982)에는 SPD 원내대표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당과 정부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8]
1983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본에서 지내다가 1990년 1월 19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공산주의 활동 (1906-1945)
드레스덴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 조합 활동가이자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이었다. 아버지보다 더 급진적이었던 베너는 청소년기에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SAJ)에 잠시 몸담았으나, 1923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총리가 독일 공산당(KPD)과 SPD 연립 정부가 있던 작센 자유주를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SPD가 이에 동조한 사건을 계기로 탈퇴했다. 이후 에리히 뮈잠을 중심으로 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뮈잠의 평화주의 노선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에게서 돈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으나 베너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2] 1924년 중등 교육을 마친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1927년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하여 같은 해 당의 구호 조직인 ''Rote Hilfe''의 드레스덴 지구 간부가 되었다. 당내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어 1930년 작센 주의회 의원(''란트탁'')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년 뒤 의원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KPD 정치국에서 발터 울브리히트 밑에서 활동했으며, 1932년에는 당 정치국 기술 서기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정권이 수립되자 공산당 활동은 금지되었다. 베너는 반나치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으며, 초기에는 자르 보호령에서 활동했다. 1935년 자르 지역이 독일에 재병합되자 망명길에 올라 처음에는 파리로, 1937년에는 소련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쿠르트 프랑크'라는 가명으로 호텔 룩스에 머물며 독일어 신문 ''Deutsche Zentral-Zeitung''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는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1937-1938)과 겹쳤는데, 많은 독일 망명 공산주의자들이 희생되었다.[3] 베너 사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그가 대숙청 시기 살아남기 위해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휴고 에버라인, 유대인 작가 헬무트 바이스 등 여러 동료들의 정치적 "결점"을 밀고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베너의 밀고는 이들의 체포, 투옥, 심지어 처형으로 이어졌다.[4]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당의 지령에 따라 독일 내 공산주의자 잠입과 반나치 저항 운동 조직을 위해 중립국 스웨덴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942년 스톡홀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체포가 당의 위험한 임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베너는 당시 공산당 정치국 의장이던 빌헬름 피크에 의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수감 중 공산당에서 탈퇴했다.[5]
2. 2. 사회민주당 활동과 서독 정치 (1946-1983)
1946년 독일로 돌아온 베너는 함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으며[5], 당 기관지 '함부르크의 메아리'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곧 당 의장 쿠르트 슈마허의 눈에 띄어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 1948년에는 당 함부르크 지구 대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49년 연방의회(분데스탁) 선거에 처음 당선된 이후, 1983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5] 그는 연방의회에서 전독일 및 베를린 문제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는 유럽 의회 의원을 겸임했다. 당내에서는 1953년부터 외교 및 전독일 문제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56년 연방의회 외교 위원회 부위원장, 1957년 연방의회 SPD 원내 부총무를 거쳐 1958년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또한 1957년부터 1958년, 그리고 1964년부터 1966년까지 SPD 의원 그룹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베너는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1959년 SPD가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공식적으로 결별하고 국민정당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6] 1960년에는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SPD의 외교 정책 기조를 수정하여 친서방 노선으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1966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CDU) 총리가 이끄는 CDU-SPD 대연정 내각이 출범하자, 베너는 전독일 문제 담당 연방 장관으로 입각했다.[7] 이 시기 그는 동독에서 탈출하려는 정치 망명 희망자들의 신병을 서독 정부가 금전과 교환하여 인수하는 이른바 'Freikauf|프라이카우프de'(자유 구매)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연정 파트너인 CDU 측에 소선거구제 도입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며 연정 안정을 꾀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이를 철회하고 소선거구제 개혁을 "헛소리"라고 비판하는 등[7] 정치적 책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69년 총선 결과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SPD-FDP 연립 정부가 출범하자, 베너는 SPD 원내총무를 맡아 강력한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었다. 그는 당내 규율을 확립하며 'SPD 정권의 보육 담당'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과반수 의석이 불안정했던 브란트 정부를 의회 내에서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2년 4월 27일, 야당인 CDU/CSU가 브란트 총리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시도했을 때, 베너는 이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매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SPD 의원들에게 투표 불참을 지시하는 등[8]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CDU의 총리 후보였던 라이너 바르첼은 단 두 표 차이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브란트 정부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베너는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은 더러운 것이다. 원내 총무가 알아도, 총리가 모르는 편이 좋은 경우도 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어진 1972년 서독 총선에서 SPD는 창당 이래 처음으로 연방의회 제1당이 되었는데, 이 승리에는 베너의 정치적 수완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베너는 브란트 정부의 주요 정책인 동방 정책 추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3년 5월에는 자유민주당(FDP)의 볼프강 미슈니크 원내총무와 함께 동독을 방문하여 에리히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과 회담하고, 동서독 간 인도적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브란트 총리의 리더십에 대한 베너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8] 1974년 브란트 총리의 측근인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으로 밝혀진 기욤 사건이 터지자, 베너는 브란트의 사임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기보다는 헬무트 슈미트의 총리직 승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8]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베너의 지지 덕분에 SPD 당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980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최고령 의원(Alterspräsident)이 되었다. 그는 연방의회 출범 이후 34년 동안 의석을 지킨 10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9월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SPD-FDP 연정이 붕괴되고 헬무트 콜(CDU) 총리가 이끄는 보수 정부가 들어서자, 베너는 이듬해인 1983년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베너는 34년간의 의원 생활 동안 총 78번의 견책을 받는 등 매우 격정적이고 논쟁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연설에서 정적뿐 아니라 언론인에게도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으며, 때로는 물리적인 충돌을 빚어 등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또한 동독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가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동독과 독자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서독 정계에서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2. 3. 은퇴와 사망 (1983-1990)
이미 1980년부터 국회의원 원로였던 베너는 사회 자유 연합이 해체된 후 1983년 총선에 불출마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본으로 은퇴하여 지냈으며, 당뇨병과 빈스반거병으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90년 1월 19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정치적 유산과 평가
독일 공산당(KPD)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 헤르베르트 베너는 나치 정권 하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모스크바 망명 시절에는 요제프 스탈린의 대숙청을 겪었으며, 이 시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NKVD에 동료 당원들을 밀고했다는 의혹이 사후에 제기되기도 했다.[3][4] 스웨덴에서 간첩 혐의로 구금된 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독으로 돌아온 베너는 1946년 함부르크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며 정치적 전환을 이루었다. 그는 당 의장 쿠르트 슈마허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빠르게 당내 입지를 다졌고, 1949년부터 1983년까지 분데스탁 의원으로 활동했다. 베너는 SPD가 마르크스주의 이념에서 벗어나 국민 정당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 이는 SPD의 외연 확장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6년 CDU와 SPD의 대연정 하에서는 전독일 문제 연방 장관을 맡았다.[7]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회-자유 연립 정부 출범 이후에는 SPD 원내대표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브란트 정부, 특히 동방 정책 추진을 지원했다. 그는 1972년 브란트 총리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 시도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브란트 총리와의 관계는 점차 냉각되었고, 베너는 브란트의 리더십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기욤 사건으로 브란트가 사임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으며, 이후 헬무트 슈미트의 총리직 계승을 지지했다.[8]
베너는 오랜 기간 분데스탁 의원으로 활동하며 서독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강경하고 논쟁적인 정치 스타일은 많은 주목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1983년 정계를 은퇴한 그는 1990년 본에서 당뇨병 등으로 투병 끝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공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의 성공적인 전환, SPD의 현대화와 외연 확장에 대한 기여, 강력한 당내 장악력과 정책 추진력 등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망명 시기의 행적과 특유의 공격적인 언변 등은 여전히 논쟁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3. 1. 동방 정책과 독일 통일
1966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가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사회민주당(SPD)의 대연정 정부에서 헤르베르트 베너는 전독일 문제 연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7] 이 시기부터 그는 분단된 독일의 현안과 동서독 관계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과거 나치당 당원이었던 키징어 총리와 전직 공산당원이었던 베너 사이의 협력은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1969년 서독 총선 결과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SPD 중심의 사회자유 연립 정부가 출범하면서 서독의 대외 정책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베너는 이 정부에서 SPD 의원 그룹 의장을 맡아, 브란트 행정부의 핵심 정책 기조인 동방 정책 추진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그는 특유의 엄격한 리더십으로 당내 의원들을 효과적으로 이끌며 정부의 정책 수행을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너의 역할은 특히 브란트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두드러졌다. 1972년 4월 27일, 야당인 CDU가 동방 정책 등에 대한 반발로 브란트 총리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시도했다. 이때 베너는 SPD 소속 의원들에게 투표에 참여하지 않도록 지시함으로써, 매수 가능성 등 변수를 차단하고 불신임안 부결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반대파 후보였던 라이너 바르첼은 결국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8] 이 사건은 동방 정책을 둘러싼 국내외의 거센 반발 속에서 브란트 정부를 수호하고 정책 추진 동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베너는 서독의 대동독 관계 및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 노력에 있어 중요한 정치적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3. 2. 논쟁적인 정치 스타일
헤르베르트 베너는 분데스탁 의원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국회의원들을 향한 날카롭고 종종 모욕적인 수사로 악명이 높았다.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발언은 종종 그들의 성을 이용한 모욕적인 말장난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헬무트 콜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한 경멸적인 신조어 "Düffeldoffelger"이 있다. 그의 날카로운 발언은 자신의 당인 사회민주당(SPD)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0년대 독일 연방 하원의 알파벳 순 좌석 배치로 인해 SPD 의원 프란츠 요제프 제비쉬가 회의실 뒤쪽에 앉게 되자, 베너는 그에게 "동무 멍청이(Genosse Doofger)"로 이름을 바꾸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 언론은 베너와 기사당(CSU) 정치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정치적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당내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최고위직은 아니었고, 슈트라우스 역시 격렬하지만 개인적인 모욕은 덜한 수사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베너의 수사 스타일 때문에 기민련(CDU)/기사당(CSU)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기민련 정치인 하이네르 가이슬러는 자신의 당 입장을 옹호하는 베너의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을 "역대 최고의 의회 곡사포(parlamentarische Haubitzeger)"(독일어 'Haubitze'는 곡사포를 의미하며, 강력하고 직설적인 발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라며 인정하기도 했다. 그의 공격적인 언변은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동시에 그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투쟁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3. 3. 한국과의 관계
4. 저작
- ''장미와 엉겅퀴 - 1848/49년 함부르크 헌법과 독일 재건을 위한 투쟁의 증언'', Verlag Christen & Co., 함부르크, 1948.
- ''민주적 시련 속의 우리 국가''; in: ''청년, 민주주의, 국가'', 본, 1967, S. 19~32.
- ''연방 하원 연설'', 빌리 브란트의 서문, 3판, 본 1970
- ''연방 하원 연설과 시대의 기록'', 헬무트 슈미트 연방 수상의 서문, 본 1978
- ''변화와 시련. 선별된 연설과 저작 1930/1980'' (게르하르트 얀 편집, 귄터 가우스 서문), 프랑크푸르트/M. 1981, ISBN 3-550-07251-1.
- ''증언'' (게르하르트 얀 편집), 쾰른: 키펜호이어 & 비치 1982, ISBN 3-462-01498-6.
- ''자기 결정과 자기 비판. 한 독일인의 경험과 생각. 1942/43년 겨울 스웨덴 감옥에서 기록됨'' (아우구스트 H. 로이거스-셔츠베르크 편집, 그레타 베너 서문), 쾰른: 키펜호이어 & 비치 1994. ISBN 3-462-02340-3.
- ''기독교와 민주사회주의. 불편한 파트너십에 대한 기여.'' 편집: 뤼디거 라이츠, 드라이잠 출판사 프라이부르크 i.Br. 1985 ISBN 3-89125-22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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